책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송시우 작가의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은 단순히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쉽게 지나쳐 온, 혹은 애써 잊고 지내던 기억의 조각들이 촘촘히 얽혀 있었고 얽혀있던 것을 풀어가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이라는 제목부터 어딘가 아련한 느낌을 주기도 하면서 라일락이 붉은색이었던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이 소설이 평범하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미스터리로 다가오다
이야기의 시작은 소박하다. 주인공 수빈은 인기 있는 강사이자 칼럼니스트로, 어린 시절을 주제로 한 칼럼을 연재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그 시절, 서울의 다가구 주택 라일락 하우스에서의 삶은 무척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라일락 향이 피어오르던 마당, 함께 뛰어놀던 또래의 친구들, 옆방에서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 그런데 어느 날, 옆방 오빠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모두가 불의의 사고로 알고 지냈던 그 사건은, 한 통의 메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어요. 살인이었어요.
한 문장으로 시작된 수상한 제보는 수빈을 과거의 그 집으로, 그리고 잊고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재미, 호기심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독자인 나 또한 함께 그 시절이 기억나게 하는 소설이었다. 그때는 그랬었지, 그래 그랬지라며. 물론 어린 친구들은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70년생에서 80년 초반 세대들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억은 늘 진실일까?
주인공 수빈은 그때의 이웃들을 하나둘씩 찾아나간다. 그들과 다시 마주한 순간부터, 서로 다른 기억들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분명히 그날 밤의 이상한 점을 기억하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예 그 사건을 모른 척 한다. 각자의 입에서 나오는 진술은 마치 퍼즐 조각 같았다.
송시우 작가는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지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 점이 이 소설을 단순한 추리물이 아닌, 심리 미스터리로 완성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일상과 스릴러 사이, 묘한 경계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은 스릴러라기엔 너무 잔잔하고, 에세이라기엔 너무 날카롭다. 바로 그 애매한 경계가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는 1980년대 서울의 다가구 주택 문화를 배경으로, 그 시대의 정서와 생활상을 정말 정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마당, 다락방, 공용 푸세식 화장실, 연탄, 이웃과의 정, 이러한 풍경들이 그저 배경이 아니라 소설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 와중에 수빈은 현재의 삶도 꾸려가야 하기에 강의를 하고, 칼럼 마감에 시달리고, 연애 문제도 있다. 이 모든 게 현실적인 감정선으로 엮여 있어, 읽는 이에게 더 진정성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진짜 '붉은' 라일락은 무엇일까
책을 다 읽고 나면 붉은 라일락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색깔의 변주가 아니라 어쩌면 라일락은 기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는데, 그 속엔 감춰진 고통과 비극이 있었다. 붉게 피었던 건 단지 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상처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서사를 좋아하는 분
- 복잡한 트릭보다는 감정 중심의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독자
- 1980~90년대 서울의 정서에 향수를 느끼는 분
- 인간 관계의 진실과 오해를 다룬 이야기에서 공감하고 싶은 분
마무리하며
책장을 덮은 뒤, 나도 모르게 오래전 살았던 동네가 떠올랐다. 그때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혹시 그 시절의 기억 중, 나만 몰랐던 진실이 있진 않을까?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은 그런 질문을 던져주는 소설이다. 미스터리 소설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기억과 사람, 그리고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의 기억과도 마주하게 된다.